현실이 너무 지독해서 게임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때는 모두 다 때려 부수거나 신나게 달리는 방식으로, 어떤 때는 유유자적한 플레이를 즐기는 것으로, 어떤 때는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으로 현실을 잊곤 한다. <판타지 라이프 i: 빙글빙글 용과 시간을 훔치는 소녀>는 그런 의미에서 참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그 모든 요건을 충족시켜주는 게임이었다.
기자의 현실도 요즘 꽤나 지독하다. 낮이고 밤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이 게임을 진득하니 잡는 데에도, 엔딩까지 보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리고 말았다. 그 덕분에(?) 출시일인 5월 22일 이후 많은 리뷰와 유저 반응을 살펴보게 됐다. 새삼 느낀다. 게임 보는 눈이 사람마다 이렇게 다양하구나. 그렇다, 기자도 다른 리뷰에 영향을 받는 때가 있는데, 이번 타이틀이 유독 그랬다. 전투가 밋밋하다는 말들이 꽤나 많았으니, 하기 전부터 기대를 조금 접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플레이해보니 기자의 경험은 조금 달랐다. 전투는 대단히 걸출하다고 평하기엔 미묘했지만 아쉬운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나름의 깊이와 철학이 있는 디자인이다. 스위치에서의 플레이를 기준으로 타격감도 꽤나 좋았다. 오히려 기자가 아쉽다고 느낀 쪽은 레벨 파이브다운 진득한 맛이 2%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웬 진득함 타령이냐고?
기자는 레벨 파이브를 '동심'(童心)을 가장 잘 지켜주는 개발사로 기억하고 있다. <요괴워치>, <이나즈마 일레븐>, <레이튼>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시 아닐까. 기자의 인생 게임인 <록맨> 시리즈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이나후네 케이지'도 (결국 퇴사했지만) 이번 타이틀의 초기 디렉터 아니었던가. 그래서 <판타지 라이프 i>도 레벨 파이브 특유의 '동심'과 '정의감'이 더 살아있길 기대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귀엽고 매력 있는 작품이다. 아마 꽤 오랫동안 이 캐릭터들과 세계관, 이야기를 잊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오히려 매력적이니까 이 이야기가 몇 걸음만 더 깊게 들어가길 원한다는 그런 욕심쟁이 같은 마음도 있지 않겠나. 이번 리뷰에선 조금 넓은 시선으로 <판타지 라이프 i>의 경험 안팎의 여러 이야기를 함께 묶어서 소개하려 한다. 아마 기존 리뷰들에선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도 꽤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통 다른 RPG가 후반부에 가서야 제대로 갈등이 고조되고, 초반에는 인물과 세계관 소개에 힘을 쏟는 반면, <판타지 라이프 i>는 초반부터 꽤 스펙타클한 전개를 보여준다.
고고학자 에드워드와 그의 앵무새 트립, 그리고 수제자인 주인공과 일행들은 '해골 드래곤' 화석을 배에 싣고 고대 문명을 탐색하기 위한 여정을 하던 중이었다. '해골 드래곤'은 어떤 섬을 향해 빛을 뿜어 길을 안내하게 되고, 어두워진 하늘에서 또 다른 드래곤이 나타나 주인공 일행을 급습하게 된다. 순식간에 두 드래곤의 전투가 펼쳐지고, 충격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해골 드래곤'은 시간의 문을 열어 대피시키게 되는데...






그런데, 주인공과 앵무새 트립은 시간의 문을 넘어 과거로 왔지만, 에드워드는 현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섬의 깊은 구멍 속에 빠지고 말았다. 주인공은 현대로 돌아가 에드워드를 구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과거 세계의 째깍째각 마을과 미스테니아 왕국의 크고 작은 고민들을 해결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등장하는 인물들이 꽤나 독특하다. 신비로운 비밀을 품고 있는 공주 '렘'과 시스콤(시스터 콤플렉스)을 가진 왕자 '라노아', 마을에서 모든 직업을 알선(?)해주는 과거가 복잡한 마성의 여인 '안 아주머니'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과거 세계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다.
그럼 현대에 남겨진 에드워드는 어떻게 됐을까. 섬의 큰 구멍 아래엔 고대 유적의 흔적으로 보이는, 고고학자의 시선에 매우 흥미로운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카를라'라는 정체 모를 힘을 가진 소녀를 만나게 된다. '카를라'의 요구 조건은 단 하나, 유적에서 나가라는 것. 하지만, 해골이의 힘으로 현대를 오가는 주인공 일행도 에드워드도 유적 안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대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에드워드와 카를라 두 사람이 현대의 유적 공간에서 다툼을 벌이는 동안, 주인공은 과거로 가서 다시 성장하고 힌트를 얻어 돌아오는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게 된다. 에드워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일반인 고고학자일 뿐이고 카를라는 신비한 검은 힘을 다루고 있기에, 유적이 무너지며 공간이 분절되면 그 너머에서 에드워드가 일방적으로 고문(?)을 당하는 연출이 꽤 자주 등장한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그 모든 고문의 종류를 나열하진 않겠지만, 뚜껑을 열고 보면 그 중엔 카레를 잔뜩 먹이는 식고문도 있고, 책을 잔뜩 읽게 하는 고문도 있는데, 분절된 공간 너머에서 소리와 대사로만 전해지는 연출에서는 다소 민망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의도된 것이 눈에 띈다. 성인 플레이어에게는 오해를 사게 만들고, 아이들에게는 위기감만 느끼게 만드는 복잡 미묘한 선을 넘나들고 있다. 참고로 이 게임은 전체 이용가다.
이하 다른 중제에서 설명할 '빙의체'로 얻는 동료들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대사를 꼼꼼히 보다 보면, 힘들어서 도와 달라는 말을 참 묘한 언어로 풀어내는 캐릭터들이 드물게 있다. 마치 <포켓몬스터> 시리즈에서 "어둠의 닌텐도"라 불리는 요소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굳이 대사를 직접 인용하진 않겠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게임에서 찾아보시길)
물론 이런 연출들이 이 게임의 메인 테마는 아니지만, 표지에서의 기대와 달리 이 정도까지 줄타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성격과 상황 표현에 있어 더 뭉근하게 선을 자주 넘나들어 봤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 약간의 아슬아슬함이 <판타지 라이프 i>의 흐름을 유치하게만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 라이프 i>를 딱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자유롭게 넘나든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현대, 과거, 오픈월드 세계인 무지크지 섬까지 크게 3개의 지도를 넘나들고, 15가지 직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게임플레이를 진행하게 된다. 또한 현대에서는 동료를 늘려가며 마을을 확장하는 것도 장기적인 목표로 함께 주어지게 된다.
이중에서도 오픈월드 세계인 무지크지 섬은, 탑이나 사당의 존재, 암벽등반과 헤엄, 오픈월드 세계에서는 이용할 수 있는 탈 것 등 여러 요소로 인해 <판타지 라이프 i>를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나 <야숨> 뿐만 아니라, <판타지 라이프 i>와 그래픽이나 표현의 스타일이 비슷한 최신작 <젤다의 전설: 지혜의 투영>과 비교해봐도 '자유'에 대한 닌텐도와 레벨 파이브의 접근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닌텐도가 <야숨>과 <지투>에서 모두 선택한 방식은 전에 없던 플레이 기믹이나 혁신적인 자유도로 놀라움과 재미를 주는 것이었다. 개발하는 입장에선 버그가 발생할 확률도 높고 변수 통제가 어려워 난도가 높은 방향성이다. 하지만 그 덕에 <젤다> 시리즈는 매번 독창적인 플레이와 기믹 활용법에 대한 재미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반면 레벨 파이브가 <판타지 라이프 i>에서 보여주는 '자유'는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병렬로 끝없이 늘리는 방식 안에서 구현되고 있다. 이 방식의 취약점은 자칫 금방 선택지가 동이 날 수 있고, 몇 개의 패턴이 플레이어의 눈과 손에 익고 나면 반쪽짜리 자유로 남게 된다는 것인데, 레벨 파이브는 여기에 '촘촘함'까지 더해 재미의 수명을 크게 늘렸다.




<판타지 라이프 i>에서 플레이어는 총 14가지의 직업을 게임플레이 내내 수시로 넘나들게 된다.
검과 방패를 쓰는 왕궁 병사, 대검을 쓰는 용병, 활과 다양한 속성 화살을 쓰는 사냥꾼, 상황에 맞는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까지 총 4개의 직업은 전투계로 분류된다. 광부, 나무꾼, 낚시꾼, 농부는 채집계로 분류되고 요리사, 대장장이, 목수, 재봉사, 연금술사, 예술가는 제작계로 분류된다. 각각의 직업은 각기 다른 장비를 착용할 수 있고, 각기 다른 성장 노드를 해금시켜나가며, 각각의 직업이 모두 확연히 다른 재미를 준다.
전투계는 각 직업별로 기본적인 공격 및 전투 대응 방식도 조금씩 다르지만, 노드 해금 과정에서 열리는 스킬이 많이 다른 게 특징이다. 기자는 초반에는 왕궁 병사로 플레이를 하다가, 중후반에는 사냥꾼과 마법사를 교차로 오가며 플레이했다. 방패가 있는 왕궁 병사는 알맞은 타이밍에 막는 저스트 가드도 있고, 다른 직업들도 모두 저스트 회피가 있다.
3회까지 연속으로 공격할 수 있는 약공, 여러 타깃에게 대미지를 주는 강공 외에도 차지 공격이 있는데, 여기서 <록맨> 스타일의 조작과 차징 효과음이 나와 반갑기도 했다. 스위치 조이콘 플레이에서는 진동 피드백이 꽤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키보드 마우스로 플레이했다면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을 법한 전투 양상도 나쁘지 않게 다가온 점도 눈에 띈다. (그래서인지 메타크리틱 평점을 보면 스위치 평균 점수는 91점, PC 평균 점수는 85점이다)


물론 이 게임도 중후반부로 갈수록 전투의 비중이 많이 높아지긴 하지만, 채집계나 제작계 직업들도 레벨 디자인을 매우 촘촘하게 한 게 눈에 띈다.
낚시, 벌목, 채광, 밭에서의 수확은 방향을 조정하며 약점을 찾는 것이 핵심 플레이로 등장한다. 약점을 찾은 후엔 차징 공격과 필살기 등을 활용해 스태미나 한도 안에서 대상의 체력을 0으로 만드는 전투(?)를 진행하면 된다. 사실 방식이 다를 뿐 이 과정도 일종의 전투처럼 설계된 점이 눈에 띄는데, 필드에는 보스급에 해당하는 희귀한 나무, 보석 광맥, 거대 작물, 거대한 물고기 등이 있다.
가장 좋았던 점은 레벨 디자인이었다. 자신의 현재 레벨보다 조금 더 높은 대상까지 넘보며 필드 공략을 할 수 있는데, 특정 노드가 해금될 때나 장비 교체를 할 때마다 확연한 성장감이 느껴지게 만들어뒀으며, 채집 성공에 대한 표현도 제일 높은 엑설런트까지 여러 단계로 나눠둬 성장 체감을 확실히 할 수 있게 해준 점이 참 좋았다. 진동, 박수와 환호를 비롯한 효과음, 이펙트 등으로 구분해 둔 가장 기본적인 성공과 엑설런트 연출의 간극도 꽤 크다.



이렇게 직업이 많다 보면 소외되는 직업도 생기기 마련인데, 기자의 취향으로는 아무래도 제작계 직업들이 그렇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있었다. 재료 모아서 제작대에서 직접 만드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구매할 수 있는 장비라면 돈을 모아서 사는 게 더 빠르고 효율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제작에 등장하는 미니게임이 귀여운 동시에 꽤 긴장감 있고 재밌어서 가장 매력적이라 느껴졌다. <붕어빵 타이쿤> 같은 게임을 스피드런으로 플레이하는 느낌이랄까. 3개의 기물 사이를 오가며 탭, 길게 누르기, 연타를 주문대로 수행하는 단순한 방식인데 묘하게 중독적이다. 높은 단계로 클리어하면 제작된 아이템에 좋은 특성이 추가로 부여되거나, 제작되는 아이템 개수가 늘어나는 방식으로 보상도 확실히 준다.
이 제작계 미니게임의 공략에는 빠른 손놀림(?)도 필요하지만, 스탯의 수치적 성장도 필요한데 이를 해결하는 방식도 재밌다. 전투, 채집은 필드에서 반복하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성장할 수 있지만, 제작은 낮은 단계의 아이템을 많이 제작하는 것만으론 성장에 다소 한계가 있는데, 이때 필요한 게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후반엔 파티원으로 함께 데리고 나가 전투나 채집을 진행해도 동료의 레벨이 빠르게 오르니 직업 동료의 성장도 신경써보자.



뻔한 것을 낡지 않게 만드는 것은, 도전 방향 자체에서부터 신선한 시도를 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레벨 파이브는 그런 작업을 그 동안 참 잘해왔는데, 그 중에서도 내러티브 영역이 특히 그랬다. 예상이 되는 서사로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출을 뽑아내는 것이 레벨 파이브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강점은 "대상이 인간이 아닐 때" 더 빛나곤 했다. <요괴워치> 시리즈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그랬고, 애니메이션 <레이튼 미스터리 탐정사무소 ~카트리에일의 수수께끼 파일~>도 22화에서 '로봇' 어시맨과 함께 진행된 에피소드는 귀여운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진하게 다가오는 동시에 큰 감동을 줘서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판타지 라이프 i>에서도 조금만 더 그 감동을 전해줬으면 하는 구간들이 있었다. 주인공 옆에 항상 따라다니는 앵무새 '트립'의 회상 장면도 그랬고, 생명 에너지를 빼앗겨 '빙의체'라는 사물로 변해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레벨 파이브였다면 이들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눈물 콧물을 쏟을 법한 연출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1,000년 이상의 시간 간극을 둔 큰 스케일의 이야기 전개를 펼쳐나가면서도,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선역과 악역의 이면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에만 집중하고, 사이드 캐릭터들의 이야기엔 다소 가벼운 터치만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그렇게 빙의체를 사람으로 돌려내 함께 다닐 수 있는 동료들 중엔 성우 '카지 유우키'(<진격의 거인> '에렌',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토도로키' 외), '엔도 아야' (<마크로스 프론티어> '셰릴 놈' 외) 등 다른 작품에서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목소리도 많다. 물론, 이들과 진행할 수 있는 상호작용이나, 함께 탐험하고 제작하면서 나오는 여러 대사들이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스토리 연출로 보여주는 것과는 또 결이 다르다.
닌텐도 3DS로 2012년에 발매됐던 전작과 달리, 한국어 자막 지원을 매우 깔끔하게 해준 것만 해도 물론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긴 시간 끝에 나온 후속작인 만큼 조금 더 레벨 파이브스러운 감동과 진득함이 있기를 원했던 건 기자 뿐일까.







